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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나이키 (NIKE) - 스포츠 마케팅의 역사

by 땡이억이 2021. 12. 19.

JUST DO IT! 한 사형수의 사형 전 말을 벤치마킹해서 탄생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광고 문구의 주인공. 35달러짜리 로고에서부터 에어조단, 최고의 스포츠 선수 마케팅, 최근에는 중국문제까지 여러 가지 이슈가 많은 나이키. 시작합니다.

나이키 로고
나이키 로고

 

나이키와 오니즈카 타이거

1957년 미국 오리건 대학교에서 만난 중거리 육상선수 필 나이트와 코치 빌 바우어만의 만남으로 나이키의 역사는 시작합니다. 그들에게는 운동화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고 대학 졸업 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진로를 변경한 필 나이트와 코치 생활을 이어오던 빌 바우어만은 손을 잡고 1964년 각각 500달러를 투자하여 자본금 1,000달러로 블루리본 스포츠 (Blue Ribbon Sports, BRS)를 설립합니다.

당시 스포츠브랜드 1위는 독일의  아디다스였는데 타도 아디다스! 당시 떠오르던 라이징썬 일본의 오니즈카 타이거가 눈에 들어옵니다. 일본 여행중에 오니즈카 타이거(현 아식스)를 찾아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블루리본 스포츠를 무역회사로 속여 미국 서부지역 판매권을 따내 신발 200켤레를 들이면서 '블루리본 스포츠 타이거 슈즈'라는 간판을 달고 사업을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오니즈카 타이거의 미국 대리점 정도였죠. 변변한 상점 하나 없이 창고에 제품을 쌓아두고 트럭으로 대학 운동장을 돌아다니며 제품을 판매하면서 첫 해 8천 달러의 판매로 250달러의 수익밖에 올리지 못했지만 필드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우수한 운동화의 지속적인 연구는 선수들의 성적에 영향을 주었고 1969년도에 30만 달러로 매출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1971년 오니즈카 타이거와 결별한 블루리본 스포츠는 계약상 문제가 있었던 육상화를 제외한 운동화의 독자적 사업을 시작하며 그리스 승리의 여신인 니케에서 이름을 따와 미국식 발음인 나이키로 이름을 바꾸어 나이키라는 회사를 시작합니다. 공동 창업자 빌 바우어만이 와플기계를 보고 생각해낸 와플 솔 기술로 만든 최초의 운동화 코르테즈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 제품은 아식스에서 나이키 로고만 아식스로 바꿔서 출시를 하게 됩니다. 후에 소송까지 붙게 되는데 나이키의 승소로 끝이 났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일본과의 인연 (feat. 니쇼 이와이)

초창기에 물건을 사올 돈이 부족해 자국 은행에 대출상담을 받으러 갔으나 계속 거절당하던 중에 한 은행 담당자가 위층에 일본 상사가 있으니 그곳에 가서 상담해 보라고 하였고, 그곳이 당시 직원 30명이었던 니쇼 이와이(현 소지츠)입니다. 참고로 지금 소지츠는 일본 7대 상사 중 하나입니다. 아마 일본인 회사여서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오니즈카 타이커는 일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대단한 기업이었고, 그 기업에서 이런 대출도 못 받는 회사의 디자인을 베낄 정도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니쇼 이와이는 나이키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고, 당시 생산거점을 일본에 두고 있었던 나이키의 제품을 위탁생산을 했던 곳은 오니즈카 타이거의 라이벌 회사였던 아사히 슈즈였습니다. 아사히 슈즈하면 아마 아는 사람이 많이 없을 것 같은데 이 회사의 모태가 고무를 만드는 회사이고 고무하면 떠오르는 게 타이어죠. 이곳에서 나온 타이어가 전 세계 No.1 타이어인 브릿지스톤입니다.

나이키에서 니쇼 이와이를 은인 비슷하게 생각한다고 느껴지는 게 나이키 본사에 가면 니쇼 이와이 가든이라는 장소가 있고 그곳에서 이런저런 행사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스포츠 마케팅와 전 세계 No.1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마케팅을 중요시 여겼던 바우어만은 대학시절 자신의 제자였던 미국 육상 7 종목 신기록 보유자인 스티브 프리폰테인의 스폰서를 하며 스타 마케팅을 시작했고 이후로도 여러 육상선수를 후원하며 자신들의 신발을 신고 출전한 대회에게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는 선수들에게서 재미를 보았고 그 기조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마이클 조던, 르브론 제임스, 코비 브라이언트, 타이거 우즈, 호나우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로저 페더러 등등 누구나 알만한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로 자사의 얼굴에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70년대 미국에 조깅열풍이 부는데 '조깅은 운동이 아니다.'라며 무시한 아디다스와 달리 와플 레이서와 같은 조깅화에 심혈을 기울인 나이키는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아디다스를 앞지르고 업계 No.1으로 올라섭니다. 1980년에는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함과 동시에 미국 운동화 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게 되지만 80년대 불어온 에어로빅 열풍에 '에어로빅은 스포츠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아디다스의 전철을 밟았고 발 빠르게 대응한 리복에 1위 자리도 넘겨주게 됩니다.

돌파구를 찾던 나이키는 나이키가 아닌 아디다스의 팬이었던 당시 신인 마이클 조던과 계약을 하게 되고 이 때부터 제작된 에어 조던 시리즈의 성공으로 매출도 급상승하게 됩니다. 에어 조던은 현재는 나이키 산하 독립 브랜드로 나와있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아디다스의 팬이었던 조던은 나이키로 대박을 쳤고, 나이키 팬이었던 카니예 웨스트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나이키에서 나와 아디다스와 대박을 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죠. 중고 신발 사이트에 올라오는 카니예 웨스트가 제작한 신발들 가격을 보면 이 친구 정말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친구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펜디의 인터사원 출신으로 그곳에서 디자인을 배웠다고 합니다.

 



나이키는 많은 회사들을 인수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현재는 컨버스와 헐리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70~80년대 세계의 신발과 가발 공장이었던 시절 나이키 전세계 OEM의 상당수를 생산했던 때도 있었고 욱일기를 밑바닥에 그려 넣은 신발로 불매 운동도 일어났던 우리라나와도 상당한 인연이 있는 기업이네요.

오늘은 이래저래 우리나라와는 인연이 있는, 또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많은 나이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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