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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카린 밀수사건 - 삼성과 박정희, 한국현대사의 어두운 과거

by 땡이억이 2022. 1. 9.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자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인 삼성을 무너뜨릴 뻔했던 사건. 대한민국 고도성장기에 일어난 정부와 거대 기업 간의 물밑 거래. 사카린 밀수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야인시대 중 국회 오물 투척 사건
국회 오물투척사건

 

사카린 밀수사건과 정재계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 물산으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연리 5.5%에 2년 거치, 8년 상환 조건으로 42,00만달러의 상업차관을 빌립니다. 정부에서는 지불보증을 해주고 은행 융자까지 알선해 주었는데 그 당시는 정부에서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다가 분야별로 나누어 사업분야를 지정해주었고 정부에서는 정치자금을 받으며 기업들에 돈을 밀어주던 시기였죠.

 

삼성은 이병철의 아버지인 이찬우 씨 때부터 지역에서 잘 나가던 집안이었는데 이찬우 씨는 YMCA 활동을 하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승만 전 대통령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고 이병철은 그런 인맥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무상으로 지원해준 이른바 3백(밀가루, 설탕, 분유) 사업을 맡게 되며 큰돈을 법니다. (물론 중간에 한 번 망했다 사돈 집안인 GS그룹의 힘으로 재기를 합니다.) 무료로 받아온 물건을 봉지에 담아서 판 것이니 제가 했어도 아마 성공했을 겁니다.;; 그 대가로 정부에 정치자금을 지원하게 되죠.

 

그 패턴을 그대로 이어 일본에서 리베이트 명목으로 나온 100만 달러를 현금으로 들여오지 않고 정부와 짜고 이런저런 물건으로 밀수를 하게 되고 그 몇 배의 이윤을 남겨 일부는 박정희 정부의 정치자금으로 들어가게 되죠. 그리고 그 품목 중 하나가 사카린이었던 겁니다. 

 



1966년 5월 24일 삼성이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세계 최대 규모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부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세관 몰래 들여와 판매하려다 적발이 됩니다. 부산세관은 6월 사카린 1059 부대를 압수하고 벌금으로 2천만원을 부과하는데 들여온 금액 100만 달러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액수였죠. 이는 1993년 사카린 밀수를 현장 지휘했다고 밝힌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가 발간한 책 '묻어둔 이야기 이맹희 회상록'에서 자세히 밝혀지게 됩니다.

 

이후 수입 100프로였던 설탕은 삼성의 제일제당에서 백설표란 이름으로 나와 불과 몇 년 만에 수입산을 몰아내고 국내에서 거의 독점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이 기업이 CJ로 개명을 하게 되죠. 물론 후에 왕자의 난을 겪으며 삼성과는 아주 사이가 틀어지게 됩니다. 이맹희는 이 사건으로 후계자 구도에서 완전히 밀려 3남인 이건희가 후계자가 됩니다.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 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이병철 회장)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 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 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 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 이맹희 회상록 中

 

 

삼성의 미디어 사업과 경쟁자

그런데 이 사실은 묻혀있다 1966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에 '또 재벌밀수'라는 타이틀로 기사화되어 알려지게 됩니다. 당시 국민들은 일개 잡범들이나 하는 밀수를 국내 대기업이 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삼성에서는 한 직원이 회사 몰래 저지른 일로 회사와는 관계없다고 발뺌하며 그 직원을 파면시키며 꼬리 자르기를 합니다.

 

당시 이병철은 이런저런 사건사고를 겪으며 재판도 받고 청와대에도 불려다니게 되는데 이에 기업인으로의 한계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좀 더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민영 TV, 라디오 방송국인 동양방송(TBC)과 신문사인 중앙일보를 개설하게 됩니다. 초기에 법무부, 내무부 장관 출신으로 정계에 영향력이 매우 깊은 홍진기를 사장으로 앉혔는데 이는 정계에서 시달리던 이병철이 그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후에 이병철의 3남 이건희와 홍진기의 장녀 홍라희가 결혼을 하며 두 집안은 사돈의 연을 이어갑니다.

 

당시 동양방송은 여러 유명 연예인이 소속된 최고 인기의 방송국이었지만 나중에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 후 눈물의 고별 방송을 끝으로 폐국되고 TV는 KBS와 통합되어 KBS2 채널이 되고, 라디오는 KBS 제 2FM이 됩니다. 뒤에 종편채널 허가로 2011년 12월 1일 JTBC로 부활을 하게 됩니다. 원래는 예전 이름 그대로 TBC로 다시 개국하고 싶었지만 이미 SBS에서 대구지역 채널로 TBC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 앞에 중앙일보의 J만 붙여 JTBC로 이름 짓게 됩니다.

 

그리고 중앙일보는 1999년에 삼성에서 분리되어 당시 사장이며 홍진기의 아들이자 홍라희의 동생인 홍석현의 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건희의 건강악화와 사후(비공식) 이 씨 집안과 홍 씨 집안의 불화가 생기고 최순실 사건이 터지며 어머니와 아들 사이까지 틀어지게 되죠.

 

 

 

역사 속 김두한이 불러온 나비효과

이렇게 만든 TBC와 중앙일보를 통해 한국비료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를 내고, 내무부 장관도 한국비료를 두둔하는 성명을 내지만 이게 오히려 국민들에게 역풍을 맞게 됩니다. 국회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대정부 질문이 열렸는데 2일차 마지막 주자로 올라선 김두한 의원은 역사에 남을 기이한 일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대정부 질문 응답 차 출석한 국무총리 정일권, 경제부총리 장기영, 법무장관 민복기, 재무장관 김정렴 등의 각료들에게 그 유명한 오물을 투척한 것입니다.

 

이후 내각은 총사퇴를 선언하고 김두한은 박정희 정부에 완전히 낙인찍혀 서대문형무소와 중앙정보부를 오가며 며칠간 고문을 당하며 두들겨 맞고 의원직도 내려놓게 됩니다. 미쓰이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전말을 발표하며 삼성의 거짓말도 들통나게 됩니다. 이병철은 삼성의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며 경영에서 물러나고 한국비료의 지분 51%도 국가에 헌납을 하게 됩니다.

 

이후 한국비료는 90년대에 다시 삼성이 인수하여 삼성정밀화학이 되었다가 삼성에서 역량 집중을 위해 사업들을 정리하며 롯데로 넘어가 현재 롯데 정밀화학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이곳에서 생산하던 요소가 세계 최대 규모였는데 그걸 계속 유지했다면 작년의 요소수 대란은 아마 없었겠죠. 그리고 이병철의 2남 이창희는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구속이 되는데 이후에 아버지를 디스 하며 왕자의 난의 핵심 인물이 됩니다.

 

이 사건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김두한은 그 후에 재혼도 하고 늦둥이 아들도 낳지만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나중에 그의 딸인 김을동도 아버지를 이어 국회의원이 되고 새누리당에서 최고의원에까지 오르는데 아버지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끌려가 폐인이 되도록 두들겨 맞고, 그의 딸은 박정희의 딸 밑에서 최고의원에 오르는 기구한 인연이 이어집니다.

 

 

사카린 밀수사건과 야인시대

이 사건은 그렇게 또 한동안 묻혀 있다가 한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다시금 재조명되게 되는데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시기에 전국가적 열풍이 불었던 야인시대란 작품입니다. 이 작품 속 사카린 밀수사건의 대정부 질문 씬에서 김영철(김두환 분)이 국무위원석에 앉아있던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에게 X 물을 뿌리는 장면이 재연되며 다시 관심을 받게 되고 그 장면은 아직도 인터넷을 떠돌며 회자가 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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